가까워질수록 멀어지는 중국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과제물에 나타난 젊은 세대의 중국 인식 살펴보니
학기를 마무리하면서 교과목의 성격에 맞는 보고서를 한 편씩 제출하도록 하였다. 담당하고 있는 중국사 관련 과목 수강생 30여 명이 제출한 보고서의 주제는 각양각색이었지만, 중국과 중국인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을 담은 보고서가 예년에 비해 급격히 늘어난 것이 주목된다.
이전에도 동북공정 등 역사문제와 관련하여 비판적인 내용의 보고서가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 학기 제출된 보고서는 제목부터 '중국은 왜 저러나?', '일대일로는 약탈행위', '중화제국주의의 부활' 등 상당히 자극적인 것들이었다.
한중수교 30년에 대한 엇갈린 평가
올해 8월이면 한국과 중국이 정식 외교관계를 맺은 지 30년이 된다. 한중수교 30주년을 앞두고 이를 기념하는 학술행사가 종종 열리고 있다. 최근 몇 주 사이에 벌써 두 차례 학술대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한국과 중국학자를 물론하고, 발표자들은 정치와 외교면에서 지난 30년간 한중 두 나라가 선린 우호관계에서 시작하여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까지 층위를 격상시켜가며 단계적으로 관계를 심화, 발전시켜왔다는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경제교류에 있어서도 양적인 성장과 질적인 발전이 있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화교류와 상호인식이라는 측면에서는 한중 두 나라가 상호 탐색기, 교류 성숙기를 지나 이제 냉각기에 접어들었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대두되었다. 곧 지금의 한중관계에서 민간의 상호인식이 갈수록 대립화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그 원인과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사문제와 문화귀속 논쟁이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사실 역사문제에 대한 중국의 '우월자적 인식'은 하루이틀이 아닌 오랜 역사를 지닌다. 문화귀속과 관련한 갈등도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여 촉발된 경우가 적지 않다.
2000년 전부터 시작된 중국의 역사왜곡
한국과의 유구하고 긴밀한 역사관계를 말할 때 중국이 가장 먼저 들고 나오는 증거로 삼는 것이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존재이다. 기자는 상나라 마지막 군주로 '주지육림'의 주인공인 주왕(紂王)의 숙부이다. 주나라가 들어서자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한반도로 옮겨간 기자가 그 곳에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것이 중국의 주장이다.
공자(孔子)도 기자가 실존인물이었다고 인정하기는 하였지만, 기자조선이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상서대전>(尙書大傳) 이다. 이 책은 진나라의 박사를 지내고 한나라 초기 활동했던 복생(伏生)이라는 사람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주나라 건국이 기원전 1046년이다. 곧 기자가 주나라를 떠난 지 어림잡아 천년 뒤에야 비로소 기자조선을 언급한 기록이 나타난 것이다. 중국인들은 어느 민족보다도 먼저 문자를 만들어 냈고 기록을 중시한다. 그럼에도 천년 동안 아무런 관련기록이 없다가 돌연 기자조선을 언급하였다. 복생 이후의 중국인, 심지어 중국사상 최고의 사가(史家)로 꼽히는 사마천(司馬遷) 마저도 아무런 비판 없이 기자조선설을 그대로 채용하였다.
기자조선 혹은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인들은 기자를 '미개한 조선'이 문화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의 '은인'으로 설정하고 이를 사실로 간주하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는 역사왜곡이 이미 2천 년 전 시작되었다.
▲20일 오후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중수교 30주년 기념화보 발간 기념식에서 김한규 21세기한중교류협회 회장(오른쪽)이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에게 화보를 전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과거 한국인에게 중국과 중국인이란?
기자조선의 존재가 터무니없는 역사왜곡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땅을 맞대고 있는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한중 두 나라가 지난 수천 년간 긴밀한 관계에 있었음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긴밀함은 왕조 간의 정치관계, 유식자 간 문화적 관계에 집중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한중 간 교류와 교섭의 역사가 수천 년에 이른다 해도, 과거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 대부분은 평생 중국의 존재를 몰랐을 수도 있다. 하물며 일반 백성이 중국인과 접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존재를 잘 알지 못하고 교류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일반 백성들은 중국과 중국인에 대해 좋든 싫든 아무런 감정도 가질 수 없었다. 단지 몽고군의 고려 침공, 조선시대 두 차례 호란(胡亂) 등 변고가 발생하였을 때만 '침략자' 중국의 존재에 대해 공포심과 적개심을 가졌을 뿐이다.
중국(인)에 대한 반감 형성의 시작점은 조선 말기
일반 백성들에게 중국과 중국인의 존재가 피부로 와 닿게 된 것은 19세기 80년대부터였다.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 수천 명이 조선에 파견되었다. 이때를 시작점으로 하여 그간 허울에 불과했던 종주권을 강화하기 위해 중국은 여러 가지 방안들을 강구하고 조선의 군사, 외교 등 내정에 간섭하였다.
중국인의 본격적인 한반도 진출의 근거가 되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한반도에 살고 있던 일반 백성들이 중국인과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무역장정이 체결된 뒤부터였다.
중국인과의 접촉이 빈번해지고 확대될수록, 서로를 알아갈수록 두 나라 백성들 간의 갈등과 충돌이 증폭되고 다변화되었다. 현재 대만의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에는 당시 한성(漢城)에 주재하던 청나라 관서에서 생산된 여러 공문서들을 모아둔 주조선사관당(駐朝鮮使館檔)이 소장되어 있다.
이들 문건의 상당수는 중국인과 조선인 사이에 벌어진 소송사건과 관련한 것이다. 폭력, 사기, 방화, 살인 등등 안건이 빈번해지면서 중국(인)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이 증폭되었다. 한국에서 민간인에 의한 반중(국인) 감정이 구체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교류와 접촉이 확대될수록 확산되는 반중감정
30년 전 국교수립 후 한동안 한중 두 나라 국민들이 서로에게 기대와 호감을 가졌던 때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교류가 빈번해지고 확대되면서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의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의 발전으로 상대의 본질을 좀 더 잘 알게 되면서 오히려 상대에 대한 불신과 반감, 나아가 혐오의 감정까지 생겨나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 중국인의 본격적인 한반도 진출과 궤를 같이하여 배태된 한국인의 반중(국인)정서는 실생활에서의 접촉과 경험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근자에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번지고 있는 반중, 혐중은 본인들의 직접 체험이나 경험의 결과라기보다는 정서와 관습의 차이 등에서 연유한 문화 갈등적 성격이 강하다.
혹자는 요즘 젊은이들이 중국과 중국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인식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중국의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제는 중국을 알수록, 중국인과의 접촉이 확대될수록 반감이 증폭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중국, 중국인과 단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으로서는 갈수록 악화되어 가고 있는 두 나라 국민간의 감정을 해소시킬만한 마땅한 방안이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