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준] 동병상구(同病相求)로 함께 하는 아시아 vs 권력으로 하나되는 아시아, 《원대신문》, <반갑다 아시아> 2022.12.05.

by 마르셀 posted Dec 0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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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다 아시아] 동병상구(同病相求)로 함께 하는 아시아 vs 권력으로 하나되는 아시아 < 반갑다 아시아 < 종합 < 원대신문 < 기사본문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wknews.net)

 

[반갑다 아시아] 동병상구(同病相求)로 함께 하는 아시아 vs 권력으로 하나되는 아시아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우리'는 단 한시도 나 혼자로서는 살아가지 못한다. 나는 언제나 '우리'이고, 이 우리는 또 다른 우리와 엮이고 관계하면서 '우리'는 더 크고 복잡한 관계의 망으로 얽혀간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라는 관계의 아상블라주는 그 관계망에 속한 각자의 '우리'에 대한 다른 생각으로 복잡성을 더해간다. 말하자면, 각자는 모두 '우리'를 말하지만, 그 각자가 말한 '우리'가 각자의 생각에 따라 모두 다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동북아시아'라는 개념이 그렇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나라들이기에 한국, 중국, 일본, 북한, 대만 그리고 러시아를 우리는 동북아시아라고 부르지만, 그런 지리적 구분으로 '동북아시아의 우리'를 말할 수는 없다. 이 '우리'가 동질감과 연대로 결속된 '우리'가 되려면, 단순히 지리적으로 인접하여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사실 동북아에 위치한 나라들 간에 '사이'는 원만하지 않다. 한국, 일본, 중국, 대만 그리고 러시아에 미국과의 관계가 교차하며, 서로를 향한 경계와 불신 그리고 적대감과 혐오가 차오른 시공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동북아시아의 나라들뿐만 아니라 전세계 모든 나라들의 상호의존성은 무척이나 높아졌다. 그렇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전세계 정치와 군사뿐만 아니라 특별히 경제문제와 식량안보 문제 등에 큰 파급효과를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상호적으로 의존하며 함께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공생보다는 적자생존과 무한경쟁의 논리에 더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왜일까? 바로 서국제국주의의 역사와 망령이 일본제국주의의 흔적을 통해 아른거리고 증폭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열강이 아시아를 압박해 들어올 때,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국제정치가 약육강식과 무한경쟁 그리고 승자독식의 장이라고 느꼈고, 그래서 스스로의 독립성을 지킬 수 있는 '자강'(自强)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는 위기 의식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캉 유웨이와 량 치차오의 변법자강운동은 당시를 살아가던 조선 지식인들에게 이 험난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영감을 제시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동북아시아의 근대는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능력과 역량을 담지하는 문제로 출발한다. 이는 뒤집어서 말하자면 동북아시아의 근대는 서양근대의 영향력으로 인해 적자생존과 무한경쟁 그리고 승자독식의 세계관을 받아들였고, 그러한 생존경쟁이라는 정글에서 어떻게 스스로의 살아갈 길을 모색할 수있는지를 강구해 나가는 시기였다는 말이다. 
 그러한 근대를 경험한 동북아시아는 일본제국주의의 출현과 목락을 생생하게 경험하였고, 이 일본제국에 대한 악랄한 경험은 여전히 동북아시아에 속한 각 나라와 민족들이 서로를 신뢰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런 상황에서 '공생'의 담론은 친일파의 기득권을 보존하기 위한 정치적 기술로 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이렇게 서로를 의심하는 관계 속에서는 각자가 스스로의 생존과 삶을 도모하는 길이 최선으로 보일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서로가 적자생존과 무한경쟁의 구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힘을 기르기 위해 '권력'으로 하나되기 마련이다. 지금 현재 동북아시아를 살아가는 한·중·일·러·대만 그리고 미국의 모습이 딱 그렇다. 모두가 믿는 것은 자신의 힘뿐이고, 약한 자가 되어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힘을 숭배하는 '권력으로 하나 된 아시아'가 되어 간다. 
 하지만 우리는 그와는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다. 일찍이 함석헌(1901-1989)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우리 민족이 고난의 민족이라는 것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고난과 역경을 겪어온 민족의 체념적인 자조가 아니라, 우리의 고난에는 "뜻"이 있음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의 고난은 우리의 나약함 때문에 비롯된 것만은 아니며, 우리의 고난은 곧 세계의 고난받는 모든 이들을 위한 고난이라고 믿었다. 기독교적 역사 이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당시 일제 강점기의 억압과 착취의 조건 하에서 고통받는 한민족의 현실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그리고 무한경쟁의 국제정치현실 속에서 도태된 약자의 절망을 기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의 고난이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세계를 위한 밑거름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한국의 고난의 역사에 담긴 뜻이라고 보았다.
 이는 우리의 고난을 초월하는 거룩한 뜻이 위로부터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임한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라, 고난받는 민중이 역경을 통해 역사의 주체와 담지자로 우뚝서게 될 "씨알"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우리가 고난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승자의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식의 희망고문이 전혀 아니었다. 우리가 고난받았음으로, 우리처럼 고통 속에 있는 세계의 다른 이들의 마음 속에 움트고 있지 못하는 씨알을 공감하며 깨울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함석헌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그리고 무한경쟁 체제를 국제사회에 구축하고 있는 국가주의에 반대하면서, 그와 밀착되어 변질된 폐쇄적 민족주의를 넘어, 우리처럼 고통받는 세계의 수많은 이들과의 연대를 꿈꾸고 있었다. 그렇기에 함석헌은 "이제 우리는 본래 평화적인 민족인 것, 고난의 터전을 맡았던 것, 대국가를 못 이룬 것, 식민지 노릇을 해본 것, 전패국(戰敗國)에 속하면서 전승국이 된 것, 해방이 되면서 이중의 구속을 받게 되는 것, 세계의 2대 조류가 이 나라의 복판에서 대립하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받는 고난과 고통에는 "뜻"이 있다는 것이다. 
 통상 우리는 '고통에는 뜻이 있다'는 말을 하면서, 고난과 고통의 극복을 의도하고, 그럼으로써 애써 고난과 고통의 현실을 외면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그 "뜻"이 있다면, 우리는 고통과 고난없는 시간을 학수고대한다. 사실 이러한 식의 극복은 극복이 아니라, 극복하고자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그 극복하고자 하는 대상에 얽매이게 되는 '이중구속'(double bind)에 빠지게 될 뿐이다. 『동국이상국집』의 저자인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李奎報, 1169-1241)는 '동병상구'(同病相求)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같은 아픔의 경험으로 서로를 구한다'는 뜻이다. 이규보는 자신의 문인의 삶을 함께 한 책상의 다리가 부러진 것을 고쳐주면서, 네가 나의 외로운 삶의 시간동안 함께 하며 나를 구해주었으므로, 이제 내가 너의 아픔을 고쳐준다고 말하며 '동병상구'(同病相求)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함석헌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우리 민족의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그 고난의 '뜻'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맥락을 갖는다.
 동북아시아는 적자생존과 무한경쟁 그리고 약육강식의 '공동체'(共同體)가 아니라, 서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하는 공통의 아픔들을 안고 있는 '공통체'(共通體)이다. 물론 여기서 '체'(體)는 조직이나 위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연대'와 '함께-나눔'의 의미로서의 체(體)를 말한다. 동북아시아는 동병상구의 공통체이자, 고난의 의미를 공유하는 공통체인 것이다.

박일준 교수(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출처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http://www.wknew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