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의 결정으로 한국국회와 정부의 관리(官吏)는 부산(釜山)으로 이동하게 되었으나, 한국정부는 서울을 철퇴할 의향은 없고, 주요관청과 내각은 일제히 서울에 재류(在留)한다. 나로서는 서울은 중공(中共) 및 북한 괴뢰군의 공격에 대하여 완전하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방송국과 일부 신문사는 이 정세에 대하여 그릇된 인상을 주고 있으며, 나는 26일 동경주재대사(東京駐在大使)에게 대하여 곧 총사령부 급(及) 일본정부와 절충하여 그릇된 선전을 고치도록 지령했다. 소식에 의하면 국회의원과 일부 정부 관리(官吏)의 철퇴를 권고한 것은 단순히 군사적인 변기(變機)에 의거한 것으로 이 권고와 같이 가령 비상사태가 일어나도 혼란하지 않도록 준비키 위해 철퇴를 권고한 것이라고 한다.
2024.09.25 15:50
정부 서울 불철퇴(不撤退), 철퇴 운운한 일본 방송국을 비난
조회 수 54 추천 수 0 댓글 0
발표일 | 1950-12-29 |
---|---|
발표연대 | 1950 |
출처 |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 |
대상국가 | 일본, 중국, 북한 |
발표자(원어) | 이승만 |
발표자(한국어) | 이승만 |
관련인물 | Douglas MacArthur, Matthew B. Ridgway |
관련 도시 | 서울, 부산 |
키워드 | 동경주재대사; 선전; 방송; 신문 |
요약내용 | 일본 언론의 서울 철퇴 보도에 대한 비판. |
제목 | 조회 수 | 발표자(원어) | 발표일 |
---|---|---|---|
안전보장 협정과 국군의 증강, 전 미국시장회의에서 녹음연설 | 47 | 이승만 | 1952-05-19 |
일본정부와 인민에게 보내는 성명 | 43 | 이승만 | 1950-01-01 |
일본정부와 인민에게 보내는 성명 | 56 | 이승만 | 1950-01-01 |
정전문제에 관하여 US뉴스·앤드·월드리포트지의 기자와 일문일답 | 27 | 이승만 | 1952-03-19 |
한일회담에 대하여 | 24 | 이승만 | 1952-02-01 |
UN 각 국민에게 보내는 성탄절 멧세지 | 43 | 이승만 | 1951-12-24 |
침략재개의 위험 미(美)기자에 경고 | 39 | 이승만 | 1951-12-05 |
개성회담 재개 조건에 관하여 | 45 | 이승만 | 1951-09-21 |
미국 극동정책의 강화를 기대함 | 31 | 이승만 | 1951-07-30 |
더 무서운 전쟁의 서곡이 될 어떠한 평화제안도 수락치 않는다 | 44 | 이승만 | 1951-06-27 |
미국 전몰용사(戰歿勇士) 추도일(追悼日)에 제(際)하여 | 43 | 이승만 | 1951-05-30 |
맥아더 장군 사임과 릿지웨이 장군 취임에 대하여 | 45 | 이승만 | 1951-04-12 |
정부 서울 불철퇴(不撤退), 철퇴 운운한 일본 방송국을 비난 | 54 | 이승만 | 1950-12-29 |
북한임시통치, UN관리설(管理說)은 미접수(未接手) | 42 | 이승만 | 1950-10-25 |
한국유엔위원단 공개회의에서 치사 | 43 | 이승만 | 1950-07-31 |
영국(英國)의 중공 승인에 경악 | 37 | 이승만 | 1950-01-07 |
태평양국가는 공통이해를 확립하자 | 34 | 이승만 | 1949-12-11 |
정의와 평화 | 49 | 이승만 | 1949-12-10 |
외국인 잠입에 대한 대통령 담화 | 26 | 이승만 | 1949-11-02 |
장기의 분열 불용인, 타국 적화해도 우리는 독립유지 | 50 | 이승만 | 1949-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