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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일 1954-07-30
발표연대 1950
출처 대통령기록관
대상국가 북한, 서서(瑞西, 스위스), 서전(瑞典, 스웨덴), 중국, 일본,
발표자(원어) 이승만
발표자(한국어) 이승만
관련인물 원용덕(元容德)
관련지역 38선 이북, 송악산
관련 도시 개성
키워드 중립국감시위원단(中立國監視委員團), 휴전협정, 휴전조약, UN, 제네바회담, 공산주의자
요약내용 중립국감시위원단 철수요구 입장에 대한 지지

중립감시위(中立監視委) 철수요구에 대한 성명서

 

이승만

1954 7 30

 

나는 원용덕(元容德) 장군이 중립국감시위원단(中立國監視委員團)에 대한 그의 행동에 있어서 옳은 일을 하였다고 믿습니다.

원래 우리는 유엔의 휴전협정을 지지할 것에 동의하였으며 결코 어느 일정한 기간 휴전조약을 준수할 것에 동의하지는 않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는 우리들의 생존을 위하여 공산주의자와 싸우고 있으며 적은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하여 모든 총구멍을 찾기에 골몰하고 있는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정확히 그리고 엄밀히 휴전조약을 지키는 동안 우리의 적은 마음대로 약 30개의 비행장을 북한에 설치하였읍니다. 그들은 많은 참호(塹壕)를 팠으며 또한 한국반도의 어떤 부분은 이미 지하굴과 지하도로서 벌집마냥 파헤처졌읍니다. 그들은 많은 MIG기를 들여오고 도처에서 막대한 군력증강을 하였읍니다. 이 모두가 휴전협정에 위반된 것이요, 이 모두가 우리들의 국민을 정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중립국감시위원단 단원들은 남한 일대를 배회하면서 촬영을 하고 기록을 하였읍니다. 그 모두가 적의 간첩행위로서 전투지역의 어떠한 장소에 있어서도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위원단중의 두 나라는 서서(瑞西)와 서전(瑞典)으로 되여 있으며 그들은 동 위원단으로부터 탈퇴할 의사를 표시하였읍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의 위협 아래에서는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공산주의 태업자, 공산주의 침략자, 간첩 또 모든 지하공작대원에 싫증이 났읍니다. 그들은 언제나 중국 일본 및 소위 38선 이북 등지로부터 들어와서는 섬, 촌락 및 도시로 잠입하는 길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리들에 대하여 치안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부주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국에 의하여 취해진 금번 행동은 제네바회담이 종결하고 휴전협약이 자동적으로 무효가 되자마자 벌써 취해졌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원용덕 장군이 중립국감시위원단문제에 관한 한, 적절하나 행동을 취하였다고 믿으며 또한 우리 외무부가 미국에게, 양국이 이러한 취지로서 공동선언을 발표하자는 요청을 전달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중립국 감시위원단 단원들에 대해서는 유엔 회원국이라면 누구나 다 당연히 받을 권리가 있는 모든 특전과 자유를 제공하였던 고로 그들이 조용히 한국을 떠나갈 것을 충고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한국을 떠날 때 전혀 어떠한 지장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 휴전이 정치적 군사적 차질은 고사하고라도, 다른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 한국에게 얼마나 손실을 주었는가를 알아주길 원하는 바입니다. 개성(開城)은 그 옛날 고려왕조의 수도입니다. 그것은 한반도에 있는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장소의 하나이며 그 가증스런 38선 바로 이남에 위치하였읍니다. 38선은 이 도시의 바로 뒤에 있는 송악산 꼭대기를 지나고 있읍니다. 1950 6월 공산주의자들은 장거리포와 박격포를 가지고 동시 일대에 무서운 총탄을 퍼부음으로서 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읍니다. 그때 카빙 소총만을 가진 한국 군경 합동부대는 전선을 지탱하지 못하였으며 그리하여 이 도시의 전주민은 점차 후퇴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주검을 무릅쓰고 집을 지키기 위하여 뒤에 남은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서는 전시(全市)는 텅텅 비게 되었던 것입니다.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부터 공산주의자들은 이 도시에서 회합할 것을 제의하였고 유엔 측은 이에 동의하였던 것입니다. 수일 후 우리는 이 도시가 적의 군사기지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읍니다. 한국군은 그들을 철퇴시키려고 하였읍니다만 유엔 측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유엔당국자들에게 있어서는 이 도시와 그 부근 지역의 상실은 휴전회담(休戰會談)을 결렬시키고서라도 막아야 할 만큼 중요한 문제가 아니였읍니다.

여러분이 한국 지도를 보신다면 개성 서남방에 38선 이북으로부터 시작하여 동 경계선 이남에까지 뻗은, 꽤 큰 반도 하나를 발견할 것입니다. 이 반도는 서로 싸우는 양개군(兩個軍) 간에 있어서 쟁취의 목표가 되어왔읍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본토로부터 동() 반도의 경부(頸部)를 통하여 남하했읍니다. 우리는 북쪽에 있는 공산군 선을 돌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 반도 전부를 확보하기 위하여서는 바다를 거쳐서 증원군을 파견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판문점 휴전회담은 우리로 하여금 동 반도의 탈환을 이루지 못하게 하였고 그리하여 또 다시 그 결과는 38선 이남에 전략적 진지를 두는 것과 같은 양보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
『방미이승만대통령연설집』, 국방부,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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