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발전과 번영의 열쇠
김일성, 소련과 조선의 경제 및 문화 협력에 대해
평양, 3월 20일, (TASS). 3월 1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련 사이의 경제문화협력합의서가 체결된 날을 맞아 신문들은 이 뜻깊은 날을 기념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민주조선> 신문은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1면에 크게 실었습니다. 노동신문과 민주조선은 김일성 국무총리의 '소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제문화협력협정 1주년을 맞아'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1년 전인 1949년 3월 17일,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소련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의 경제문화협력협정이 체결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이 합의는 해방자인 위대한 소련의 조선 인민에 대한 사심 없는 형제애적인 지원의 표시이며, 조선 인민과 소련 인민 사이의 나날이 커져가는 우호의 상징입니다. 김일성은 해방 이후 발전하고 신생 공화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인 소-조선 관계 발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강조했습니다. 군은 조선 인민이 자발적으로 조국을 부흥시키고 민주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마련하였습니다. 김일성은 소련군이 주둔한 공화국 북부에서 인민민주주의 체제의 견고한 토대를 마련하고 조선 인민이 조국의 참된 주인이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해방 후 4년이 넘도록 소련 정부가 끊임없이 제공한 정치, 경제, 문화, 기술 지원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서 조선 인민의 자신감을 굳건히 하고 건설적인 사업에 힘을 불어넣었습니다.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조국을 회복하기 위한 소련의 지속적인 지원과 조선 인민의 사심 없는 노력에 힘입어 우리 공화국 북부 지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강력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기반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전국적으로 우리 젊은 공화국 국민의 물질적, 문화적 생활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협정이 체결된 후, 공화국 북부에서는 첨단 기술과 현대 장비가 필요한 대규모 창작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소련 정부는 합의에 따라 국가 경제의 새로운 부문과 우리 젊은 공화국의 산업 발전에 필요한 기계, 자재 및 원자재를 충분히 제공하고 전문가를 파견하여 산업을 복원하였으며, 새로운 공장 설계에 막대한 지원을 제공하였습니다.
김일성은 양국 간 무역액이 증가했다고 언급했습니다. 1946년 무역 회전율을 100으로 하면, 1947년에는 204%, 1948년에는 357.7%, 1949년에는 459.8%에 이르렀습니다. 김일성은 1949년에 소련으로부터 코크스, 석유, 공장 장비, 전기 장비, 농업 기계 등 산업 발전에 필요한 기계, 자재 및 원자재를 수입했다고 밝혔습니다.
작년에 소련 정부는 우리나라 북부 여러 지역에 위치한 소련 적십자사 병원 15곳에 630개 병상을 갖춘 완전한 장비와 모든 의료 장비 및 의약품을 우리 정부에 기증하였습니다. 김일성은 인민민주주의 국가들과 북부 지방에서 소련과의 협력과 우호 관계에 기초하여 정치, 경제, 문화 건설의 모든 분야에서 빛나는 성과를 이룩하였다고 적었습니다. 우리 국민경제는 소련의 일관되고 지속적인 도움과 지원을 받으며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1946년 산업 생산 수준을 100으로 하면, 1947년에는 189.3%, 1948년에는 263.3%, 1949년에는 377.1%로 증가하였습니다. 기계 제작과 경공업은 전쟁 이전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1944년과 비교하면 기계공장 생산량은 246.9%, 경공업 기업 생산량은 152.7%에 이르렀습니다. 1946년과 비교하여 노동 생산성은 1947년 170%, 1948년 235.8%, 1949년 293.4%에 달했습니다. 그리하여 소련과 우리 공화국 사이의 경제문화협력에 관한 합의에 따라 1949-1950년 국가경제 2개년 계획의 첫해 목표 수치를 성공적으로 달성하였습니다.
동시에 미제국주의자들은 소위 경제적 ‘원조’를 통해 우리 조국의 남부 지역을 자신들의 진부한 상품을 판매하는 시장으로 만들고 있으며, 우리 나라의 부를 약탈하고 민족을 파괴하는 정책을 공공연하게 벌이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미국의 ‘도움’에 대한 수치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한국의 기업 수는 1943년에 비해 1946년에 52개, 1947년에 45%, 1948년에 37%로 감소했습니다. 1949년 상반기에는 최대 36%까지 줄어들었습니다. 이러한 가계 경제의 파괴는 생산의 급격한 감소를 동반합니다.
1945년 말과 비교할 때 1949년 기계공학 산업의 제품은 단 5개에 불과했습니다. 운송수단 생산은 8%, 농기구는 9%, 시멘트는 17%, 심지어 ‘가장 발전된’ 섬유 산업의 생산량도 13%에 그쳤습니다. 농업에서도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남한의 경작 면적은 1945년 87%에서 1948년 66%로 줄어들었고, 1949년에는 최대 55%까지 감소했습니다.
한국의 소매 가격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습니다. 전쟁 전과 비교할 때 1946년에는 134~162배, 1947년에는 400~402배, 1948년에는 732~818배, 1949년에는 821~1,003배 증가했습니다.
결국 ‘경제력’을 가장한 미국의 야만적이고 약탈적인 정책의 결과로 지금 우리 나라 남부는 황폐화와 굶주림, 실업의 왕국으로 변모하였습니다. 미국이 외치는 이러한 ‘경제적 지원’이 계속된다면 우리 조국 남부가 어떤 상태가 될지는 모든 사람에게 분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을 노예로 삼고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미제의 사악한 정책과 그들의 부패한 행위에 맞서 조국의 구원을 위해 온 조선 인민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승만 도당은 조국의 반역자들입니다.
현재 우리 공화국의 남부와 북부에 조성된 정치경제적 상황은 우리 조선 인민들로 하여금 소련이 조선 인민에게 베풀어온 성의 있는 원조의 의의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며, 우의를 돈독히 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는 소련과 함께 우리 조국의 번영과 미래 발전을 보장할 것입니다.
김일성은 결론적으로 전체 조선 인민이 소련과의 영원하고 불가분한 친선을 강화하는 것이 조선 인민의 자주성을 위한 관건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번영과 발전을 위한 필수적임을 점점 더 인식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친선을 강화해야만 조선 인민이 통일되고 자주적인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소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제문화협력협정 체결 1주년을 맞이하여 온 조선 인민은 두 나라 사이의 친선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명합니다. 극동 지역과 전 세계의 평화와 안보를 위해, 양국 국민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소련의 해방과 원조로 맺어진 영원하고 흔들리지 않는 친선을 강화하는 것은 국제 민주주의 진영을 더욱 강화하고, 새로운 전쟁의 선동자들에 맞서는 투쟁에 기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