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수교 30주년, 김구와 그의 아들 김신을 기억하는 이유 (pressian.com)
한중수교 30주년, 김구와 그의 아들 김신을 기억하는 이유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김구, 백범일지를 아들에게 남기다
2004년 12월 타이뻬이 한 호텔에서 학술회의를 마치고 주최측의 만찬에 참석했다. 같은 테이블의 노년의 신사는 필자에게 혹시 '김신'을 아냐고 물었다. 안다고 대답 하자, 그 노신사는 김신이 본인의 친구라고 하면서 한참 동안 그에 대해 이야기 했다. 김신, 바로 백범 김구의 둘째 아들이다.
백범은 자신의 일대기를 일지 형태로 후대에게 남겼다. <백범일지> 서문에 자신의 아이들에게 온전한 한국근대사와 항일의 역사 이야기를 전해주기 위해 위함이라고 명시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백범일지>는 그의 온전한 생애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면서 한국독립운동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문헌이다.
그의 <백범일지>가 백년의 애독서가 된 것은 자서전의 함정에 빠지지 않은 진솔한 고백이기 때문일 것이다. 역신(逆臣)의 후손으로 황해도 산골에 숨어 살아야 했던 신분의 비극을 딛고 일어나 한 나라의 수반이 되기까지의 역사를 그리면서 그는 담담했고, 겸손했으며, 정직했고, 교만하지 않았다.
수많은 고난과 풍파 앞에 우뚝 선 그였기에 그의 생애가 더욱 빛을 발한 것이다. 그에게는 수많은 어려움과 죽을 고비가 있었는데 이른바 '남목청'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남목청 사건과 제국주의 일본의 밀정
후난성(湖南省) 창사시(長沙市) 난무팅(楠木廳) 6호에는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 장사활동구지(김구활동지)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이 건물은 원래 1938년 초 독립운동가 지청천을 중심으로 한 조선혁당이 본부로 사용했던 곳이자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이 거주했던 장소이다. 2층에는 조경한과 현익철이, 아래층에는 지청천·김학규·강홍대 등이 거주했는데 1938년 5월 7일 김구 선생이 3당 통합회의 도중 피격당한 '남목청 사건'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진영에서는 이를 민족해방과 조국광복의 기회로 판단했다. 이에 우파계열에서는 독립을 위한 통합과 단결을 위한 협동전선운동이 일어나 단체의 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김구가 이끄는 한국국민당과 조소앙의 재건한국독립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의 합당이 그것이다.
이 3당의 합당은 김구의 한국국민당이 중심이 되었다. 당시 민족혁명당을 탈당한 지청천 계열은 조선혁명당을 창당하여 독자노선을 모색하고 있었고 조소앙 등의 재건한독당도 활발한 활동은 전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혁명당과 재건한독당은 재정여건이 열악하여 김구의 지원이 필요했고 김구 역시 이들과의 연합을 통해서 독립운동 세력을 응집할 필요가 있었다.
1937년 초 남경에서는 이들 각 당의 대표인 송병조, 홍진, 지청천의 회담이 개최됐다. 이들은 공동성언서를 발표하여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강화하는 데 합의했다. 또 미주지역 단체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로써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가 결성됐다.
이러한 연합으로 각 단체의 재편이 논의됐고 마찰이 일어났다. 조선혁명당의 강창제·박창세·이규환 등은 이러한 논의에서 소외감을 느꼈다. 이에 이들은 이운한을 이용하여 김구·현익철·유동열·지청천 등에게 총을 발사하는 이른바 '남목청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광복진선은 중일전쟁으로 일제가 난징(南京)을 점령하자 장사로 이동을 하게 됐다. 지청천을 중심으로 한 조선혁명당은 장사의 남목청을 본부로 정하였고, 여기에서 3당(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을 합당하는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 회의장에 조선혁명당 간부 출신이 난입하여 총을 발사한 것이다. 첫발에 김구를 시작으로 현익철·유동열·지청천이 각각 피격되었다. 현익철은 이 피격으로 즉사하였다.
사건 발생 한 달 뒤인 1938년 6월 15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6인은 '남목청사건'에 대해 반동사상을 품은 이운환의 개인행동으로 공식발표했다. 반면 일제는 "김구파 한국국민당 일파와 지청천파 조선혁명당 내 일부 분자와의 사이에 내홍"과 "간부 지위 쟁탈 내지 자금 분배에 기인한 분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련하여 다음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암살 대상자인 김구가 이 사건에 관해 언급한 부분이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남목청 사건의 "일대 의혹은 강창제·박창세 두 사람에게 집중"됐다고 하며 박창세에 대해 두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하나는 수십일 전에 강창제가 자신에게 "상하이에서 박창세가 창사로 올 마음이 있으나 여비가 없어 오지 못한다니 여비를 보조해 달라"고 청해서 "나는 상하이 기관에 위탁하여 처리하겠다"고 했다. 그 이유는 박창세의 맏아들 박제도(朴濟道)가 일본총영사관의 정탐이 된 것을 이미 자세히 알고 있었고, 박창세가 그 아들 집에 살고 있는 데에 특별히 주목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로 김구는 사건 발생 후 "경비사령부 조사로 알 수 있듯이 박창세가 창사에 도착한 직후 상하이에서 박창세에게 200원이 비밀리에 지원됐다"고 했다. 김구는 이 두 가지 사실을 근거로 이운한은 "강·박 양인의 악선전에 이용된 나머지 정치적 감정에 충동되어" 이 사건을 일으킨 것이라고 판단했다. 김구는 이 사건의 배후 인물로 박창세, 강창제를 주목했고 특히 그 가운데서도 아들이 일제의 밀정인 박창세를 의심했다.
둘째, 일제 경찰이 입수한 정보 즉 김원봉파 조선민족전선연맹 간부가 이 사건에 대해 한 비평이다. 이에 따르면 "박창세, 강창제의 사주에 의해서 이운환이 김구 등을 저격했던 것은 표면적으로 거두의 지위쟁탈에 기인한 듯이 보이지만 상하이사변 중 박창세가 여러 번 하비로를 태연하게 산보하고 또 자택에서도 편하게 거주하고 있던 점에서 전부터 일본관헌과의 사이에 거두 김구를 죽인다는 묵계(黙契)가 있었다. 이 기회에 부하 이운환으로 하여금 결행시킨 것으로 추단된다."고 했다.
일제 경찰은 이 정보를 '편견적 비평'이라고 비판하고 이 사건의 배후에 '일본관헌'이 있다는 주장을 부정했다. 일제의 이런 주장은 아마 이 사건에 자신들이 고용한 밀정이 관계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상하이일본총영사관 경찰부의 밀정이 된 박창세가 김구에 대해 불만을 가진 청년 가운데 조선혁명당에서 출당된 이운환을 김구 암살에 동원했던 것이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난 뒤 변화된 정세 속에서 중국 관내의 전선통일과 독립운동 노선 그리고 열악해진 경제적 사정 등이 겹치면서 김구가 주도하는 관내 민족진영 내부에 갈등이 생겨났다.
일제는 바로 이런 갈등의 한 결과인 반김구 세력인 박창세를 권투선수인 둘째 아들의 귀국 문제로 회유하여 김구를 암살하려고 했고, 밀정이 된 박창세는 김구에 불만을 가진 이운환을 사주하여 이른바 '남목청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결국 남목청사건 즉 제3차 김구 암살 공작은 일본총영사관 경찰부가 조선총독부 상하이 파견원의 협력을 얻어 박창세를 회유하여 김구를 암살하려고 했던 사건이었다.
남목청사건 이후 박창세가 상하이로 피신한 뒤 '재지나파견총사령부(在支那派遣總司令部)'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남목청 사건이 일제가 치밀하게 준비한 백멈 김구 암살의 사례였음을 밝힌 연구가 나올 만큼 일제는 김구를 제거하기 위해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낡지만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기록을 공간으로 기념하다
2007년 경 창사시에서는 김구의 활동지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한중관계가 비교적 안정된 상태에서 창사시에서는 현지 역사학자들의 고증을 통해 김구가 피격당한 조선혁명당 건물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시작했다.
중국 중앙정부 차원에서 움직였으며, 한국의 백범기념관에서는 김구의 동상을 제작하는 데 일조할 정도로 남목청 사건 현장은 빠르게 옛 모습을 복원해 갔다. 2009년 개관 이래 해마다 7만~8만명 정도의 한국인이 꾸준히 이곳을 찾고 있다. 한국 관광객들이 장자지에(張家界)를 가기 위해서는 대부분 장사 공항을 경유하기 때문에 이곳 여행사와 지방 관청에서 필수 코스의 하나로 '남목청'을 선정해서 운영하고 있다.
어쩌면 한국 독립운동사적지가 중국인들이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비난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잊혀진 공간을 찾지 않는다면 시간의 역사 역시 우리에게서 멀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 비용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개관 당시에는 전시 오류가 곳곳에서 발견됐다. 중국에서 자체 제작하다보니 한국독립운동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가 부족한 측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한글 표기에도 낯선 부분들이 많았다. 이러한 사정을 서로 교감하면서 마침내 광복 70주년이자 그들에게는 승전 70주년인 2015년에 전시 내용을 전면 교체하고 그 해 8월 15일에 한국정부 대표와 중국 정부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재개관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여전히 백범 김구의 동상과 그의 아들 김신이 쓴 '한중우의' 휘호가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한중수교와 김신
백범의 둘째 아들 김신은 1922년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났다. 김신의 꿈은 비행사였다. 그는 아버지 백범의 바람대로 중국 쿤밍(昆明) 공군군관학교에서 수학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쿤밍은 중국이 미국에게 원조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젖줄이었다.
하지만 전황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김신은 미 공군기지가 있는 인도 동북부로 향했다. 중국에서는 비행훈련을 시행할만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신은 오늘날 파키스탄 영토에 속하는 인도령 라호르 공군기지에서 초등 비행훈련을 마쳤다. 그리고 1945년 8월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아버지에게 귀국길에 동행하고 싶다는 편지를 쓴 김신은 곧바로 미국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 김신에게 비행훈련 교육을 마무리하려면 미국에 가야한다고 하는 김구의 입장이 워낙 강고했기 때문이다.
김신은 1945년 12월 뉴욕에 도착한 후 다시 텍사스주 샌안토니오로 갔다. 그곳에서 북동쪽 24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랜돌프 공군기지가 최종 목적지였다. 그곳이 미국의 공군사관학교였다. 김신은 랜돌프 공군기지의 엄혹한 훈련과정을 마치고 1947년 8월 말 상하이에 도착한 뒤 난징에 가서 중국 공군으로서 임무를 마치고 제대했다.
그리고 그해 9월초 13년 만에 그리운 고국에 도착하였다. 곧바로 김구가 머물고 있던 경교장으로 달려간 김신은 통일운동에 전념한 아버지를 모시고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다. 하지만 1949년 6월 경교장에서 아버지 김구의 죽음을 목도해야만 했다.
한국전쟁 때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한국 공군 비행사로 활동했던 그는 공군참모총장을 거쳐 1962년 9월 대만 대사로 부임했다. 그 때 그는 아버지가 강조한 아름다운 문화의 나라 대한민국을 알리고자 했던 것 같다.
당시 신해혁명의 주역이자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중국 혁명가들의 후손을 초청하여 훈장을 수여하고 기념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그 답례로 1969년 8월에 남산에서 백범 김구 동상 제막식 때 당시 중화민국 고시원장 순커(孫科, 쑨원의 아들)가 장제스(蔣介石)의 특사로 참석했다. 장제스는 동상 건립을 기념하는 친필 휘호도 보내줬다.
1988년 중국을 떠난 지 40년 만에 김신은 베이징을 방문했다. 그는 중국 고위급과 접촉하였으며, 이러한 사항을 당시 한국지도자들에게 상황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는 1992년 한중수교의 밑그림을 적극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중수교 2년 뒤에는 <백범일지> 중국어판 출판 기념식을 한국의 국회의사당에 해당하는 중국 인민대회당에서 개최했다. 백범의 항일독립운동을 중국 대륙에서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뜻깊은 행사였다.
오늘날 차별과 차이, 혐오와 갈등의 시대 백범 김구와 그의 아들 김신의 활동은 한중 수교 30년에 꼭 기억해야할 귀한 역사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