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광복이 반공? 반민특위 없애던 친일파와 닮은 논리 (pressian.com)
윤석열, 광복이 반공? 반민특위 없애던 친일파와 닮은 논리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한국의 '반민특위'와 중국의 '한지엔(漢奸) 재판'
같은 경험, 다른 기억- 8.15의 기억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는 라디오를 통해 제국 일본의 패망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한국인들에게 이 날은 영원히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날이다. 독립운동가 민세 안재홍은 바로 이날부터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8월 15일 늦은 오후에 안재홍은 휘문중학교 교정에 모인 수많은 민중들 앞에서 해방 민족이 나아갈 앞날을 제시하는 열띤 연설을 강행했다. 이때 중학생이었던 송건호는 "영양실조와 고생으로 윤기 없이 까맣게 타버린 걸인 같은 모습의 안재홍의 얼굴은, 일제의 총검 치하에서 온갖 유혹과 협박을 물리치고 끝내 민족의 양심을 지킨 민족지도자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기억했다.
민세와 같은 민족지도자들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광복 이후에도 3년간 미군정 하에서 생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승전국들과 패전국의 실태는 명확해졌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패전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허리가 두 동강이 났다.
그리고 5년 뒤 민족적 비극인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며, 남과 북은 광복된 지 77년이 되도록 대결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패전국 일본 역시 6년 반 동안 연합군최고사령부의 통치를 받았다. 중국은 국공 내전이 발발하면서 대륙의 주도권은 공산당이 장악했고, 국민정부는 타이완으로 이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은 동북아의 판도를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반민특위법을 만드는 자와 반대하는 자
민군정이 종식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식 정부가 수립됐다. 반민법은 1948년 9월 7일 가결되어 우여곡절 끝에 9월 22일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공포됐다. 당시 신문이나 일반 사회단체, 청년단체는 성명서를 내고 친일파 처단을 통한 민족정기 회복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반민법 제정논의가 본격화되었던 8월 26일 국회의원의 숙소와 시내 각처에는 '행동대원' 명의로 '삐라'가 뿌려졌다. 내용은 공산주의자는 반민족세력이고, 반공세력은 민족세력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는 반공이데올로기를 이용해 친일파숙청문제를 이념대립으로 바꾸려는 의도였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국회에서 삐라가 뿌려지고 국회의원들 간의 고성이 오고간 것이다. 삐라를 살포했던 자들은 체포되었지만 며칠 뒤 석방됐다.
현행범을 석방시킨 내무부 장관은 윤치영이었으며, 1948년 9월 23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한 '반공국민대회'도 내무부가 주관하는 등 내무부는 반민법 제정을 반대했던 핵심기구였다.
윤치영은 1941년 임전대책협의회에 참여하는 등 친일경력의 소유자였다. 반공국민대회는 실질적으로 대회 당일 곳곳에 "국회에서 통과한 반민법은 반장이나 통장까지 잡아 놓을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온 국민을 그물로 옭아매는 망민법(網民法)"이라는 삐라를 뿌렸다.
이 대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축사가 낭독됐고, 이범석 국무총리가 직접 참석했으며, 반민피의자 이종영과 상공부 장관 임영신 등이 참여했다. 한술 더 떠 윤치영은, 이 대회는 해방 이후 처음 보는 애국적 대회라고 찬양하기도 했다. 반민특위의 활동이 순조롭지 못할 것임을 예단할 수 있는 행사였다.
반민법 폐지 활동
반민법 폐지는 1949년 2월 2일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 문제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면서 대국민적 명분을 쌓으려고 했다. 반민특위의 행위가 3권 분립에 위배된다는 것이 형식적 이유였지만, 반민특위에서 특별재판부와 특경대를 폐지시켜 실질적으로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민의의 대표기관이었던 국회가 통과시킨 법에 대해, 국무회의에서 수정안을 제출했던 것이다. 수정안의 주요 골자는 "악질적인 민족정기 훼손 자 이외의 조선총독부 공무원 대부분을 재등용해야 한다"라는 것이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2월 15일 반민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다음날 국회의원 김상돈과 노일환은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에 대하여 독선과 독재의 표본이라고 지적했다. 대법원장 김병로 역시 반민법은 헌법에 부합되며 반민특위 활동은 정당하다고 평가했다.
반민특위특별위원장 김상돈의 수정안 반대의견, 백범 김구의 반대의견 등이 개진되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반민법 수정은 강령한 의지로 마침내 1949년 10월 4일 통과됐다. 그 과정에서 국회프락치사건, 반민특위습격사건, 백범 암살 등 비정상적 국가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이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반민법을 적극 옹호하는 국회의원과 대법원장을 암살하려는 계획이 실행직전에서 미수에 그친 경우도 있었다. 노덕술이 서울시경 최난수와 홍택의, 박경림 등과 협의하여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고용했고, 신익희 국회의장, 김병로 대법원장, 김상돈 특위 위원장 등을 포함하여 수많은 반민법 옹호자들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실행자금 30만 원 가운데 친일파였던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이 수표로 10만 원을 제공했다. 민족정기를 말살하려고 했던 제국 일본에게 적극 부역했던 자들이 반격을 가했던 것이다. 불행중 다행스럽게도 이 계획은 백인태가 평소 존경하던 김준연 의원에게 이 사실을 알려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반민특위 활동은 정상적으로 펼칠 수가 없었다. 한국전쟁 와중이었던 1951년 2월 14일 반민족행위재판기관임시 조직법은 폐지됐다. 반민법에 따라 공소중인 사건은 모두 공소가 취소되었고 본 법에 의한 판결 역시 효력이 상실되었으며 친일파 청소 문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중국의 '한지엔(漢奸)' 그리고 '한지엔 재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 역시 반민족, 반국가 행위자에 대한 숙청문제에 직면했다. 한지엔(漢奸)은 이러한 행위자의 비칭(卑稱)이다. 이민족의 침략을 당했을 때 사적 이익을 위해 공동체의 안위를 부정한 인물들이 바로 한국에서는 '친일파', 중국에서는 '한지엔'이다.
'한지엔'이란 용어는 고대부터 사용되었다. 이른바 변강 이민족에게 한족의 이익을 팔아넘긴 반역자를 의미했다. 19세기 말부터는 '한족'의 범위를 넘어섰다. 신해혁명 후 중화민국이 건립되면서 현대적 의미의 한지엔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민족반역자에 매국이라는 의미가 가해져 '한간매국적'으로 변화했다.
항일전쟁시기 한지엔이라는 개념은 일제침략자와 결탁하여 나라를 팔어먹고 민족에 해를 끼친 반역자에 대한 지칭이었고 점차 사회적 관용어가 되었다. 근현대 이후 중국에서 다민족의 융합이 강화되면서 한족이라는 개념은 '중화민족'으로 바뀌었으며, 충군사상도 국가의 주권과 영토를 보호하고 외래 침략을 반대하면서 중화민족의 부흥을 도모하는 애국주의 사상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중국에서 14년의 항일전쟁기간에 제국주의 일본 침략자들과 결탁하여 중화민족의 이익을 팔아넘긴 반민족적 매국집단을 습관적으로 한지엔으로 불렀다. 영화 <색계>에서 양차웨이(梁朝偉)가 열연했던 역할이 바로 '한지엔'이었다.
중국에서의 한지엔 처벌에 관한 법률은 중일전쟁이 발발했던 1937년 8월 23일에 제정됐다. 그 이유는 중일전쟁 이후 제국주의 일본에 협력하는 친일한지엔이 급속하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해 12월 10일에는 한지엔 재산에 대한 몰수 조례도 제정됐다. 그리고 다음해 8월 15일 '수정징치한간조례(修正懲治漢奸條例)'가 공포됐다. 수정 조례는 그야말로 '반민족행위자'에 대해서 엄격했다. 적국과 통모하거나 반민족행위를 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종전 전에 한지엔 문제는 군법으로 다루었다. 전쟁 중에 일어났던 군사간첩의 활동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중국은 종전 후 사회적으로 한지엔을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국민정부는 종전 후 3개월 뒤인 11월 지난 후 한지엔 처벌에 관한 구체적인 조례를 마련했다. 한지엔 체포를 주도한 것은 따이리(戴笠) 지도하의 군사위원회 조사 통계국(이하 군통국)이었다.
군통국은 장제스의 비준을 받아 전국 각지의 한지엔에 대한 체포 작전에 돌입했다. 1945년까지 주요 한지엔은 검거됐다. 처벌 기준은 성장(省長)급은 사형을 적용했다. 자료마다 차이는 있지만 1947년말까지 민간인 한지엔 처형자 수는 15명이었다고 한다. 물론 2000여 명이 사형당했다는 기록도 있어 그 편차가 크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확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1949년 국민정부는 공산당에게 밀려 퇴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지엔 법이 적용된 지 불과 2년만에 풀려난 자가 90%를 넘었다. 중국 대륙은 공산당의 차지가 되었으며, '한지엔'에 대한 처리도 숙청에서 '교화'로 바뀌었다. 만주국의 황제 푸이(傅儀)가 무순전범관리소에서 10여 년을 복역한 후 '중생(重生)' 즉 다시 태어났다고 하는 주제의 드라마를 방영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중국은 항일영웅에 대한 무한존경과 지원을 보내고 있으며, 한지엔 문제는 역사 속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로 처리했던 것이다.
반면 영화 <암살>에서 주인공 이정재가 "독립이 될지 몰랐다고" 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한 후 풀려난 장면은 당시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기도 했다.
반민특위가 와해된 후 대한민국은 무서운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그 속에서 '친일파' 청산은 동력을 잃었으며,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심하게 훼손됐다. 친일파는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분단시대를 고착화하는데 기여(?)했다. 첫 단추를 잘못 낀 대가는 너무도 컸다.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존경과 기념으로 표상되어야 하지만, 많은 정치인들은 독립운동가 기념 행사에 얼굴만 내미는 것으로 자신의 책무를 다한 것이라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나라를 위해 기꺼이 순국하신 선열들에 기대어 산 자의 이익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 아닌지" 냉철하게 스스로를 점검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