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제의 마지막 길, 추모는 해야겠지만 (pressian.com)
마지막 황제의 마지막 길, 추모는 해야겠지만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최고 지도자 장례 뒤에 가려진 '민(民)'의 고난
인생의 마지막 예우, 장례식
한 시대 중요 인사의 죽음이 지니는 의미는 아주 크다. 지난 9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망했을 때 전 세계는 대서특필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민주공화정 시대에 왕정이라니, 하며 갸우뚱거릴 수도 있지만 어찌 됐든 그는 영연방의 상징적인 존재였고, 아직까지도 왕정을 바라보는 시각이 '외경'과 부러움의 교차점 사이 어디쯤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이 장례식의 조문으로 인해 한국 사회도 한차례 들썩였다.
융희 황제의 전통장례식(?)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 인류는 죽음에 대한 기억과 기념의 방식이 다르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융희 황제)의 장례식은 어떠하였을까.
독립운동사에서는 순종의 장례식과 6.10 만세운동을 연결하여 언급하는 일이 많다. 제국주의 일본은, 1919년 고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독립선언'이라는 거대한 민족적 불길이 한반도 전국은 물론이거니와 전 세계 곳곳으로 번져갔던 것을 기억하고 이에 대한 트라우마를 품고 있었다.
6.10만세운동은 비록 조선총독부가 사전에 이를 탐지하고 방해하였기 때문에 3.1운동과 같은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순종의 장례식을 식민지의 공고화로 역이용하고자 했다.
순종은 1874년 출생하여 1926년 4월 25일 사망했다. 그는 고종과 민비(후일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 가운데 유일하게 장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왕조는 그가 태어난 시기부터 서세동점의 국제적 분위기 속에서 위난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는 1895년 어머니를 여의는 아픔을 겪었고, 1898년 이른바 김홍륙의 독살사건 때 다량의 아편이 든 커피를 마신 후유증으로 평생 좋지 않은 건강 상태로 생을 영위했다.
1910년 8월 나라의 운명이 제국주의 일본에 송두리째 넘어가는 비참한 지경을 직접 목도했으며, 부친 고종은 1919년 1월 사망했다. 그로부터 불과 7년 뒤인 1926년 4월 25일 그도 영원히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순종의 장례는 국장으로 진행됐다. 당시 모든 권한은 제국 일본이 쥐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의 국장은 5개월 간 장례를 치루고 다시 궁에서 3년상을 치룬 뒤 신주를 종묘에 봉안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국장에는 일본식 개념을 차용했다. 순종의 국장은 일본 국내성에서 관장하였는데, 이는 대한제국이 '식민지'임을 확실하게 각인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순종의 국장은, 일본의 신도(神道)가 포함된 근대의 일본식 국장과 조선식 국장이 결합된 형태를 보였다. 예컨대 '전통적인' 국상에는 없는, 오늘날의 영결식과 같은 봉결식이 거행되기도 했으며, 장례곡이 연주되기도 했다.
TV나 영화에서 자주 보는 조선 시대 국상의 첫 장면은 신하가 궁궐 지붕에 올라가 고인이 된 왕의 혼을 부르며 사망 소식을 알린다. 이를 복(復)이라 한다. 초혼의식을 해야만 발상(發喪)이 되고, 시신을 수습해서 빈전에 모시는 절차를 밟을 수 있다.
하지만 순종은 하루 늦게 발상이 이루어졌다. 일본 국내성이 순종 사망 하루 뒤에 승하 소식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여러 논란을 뒤로 하고 순종의 발인은 6월 10일로 정해졌다.
1926년 6월 10일 발인에는 상여꾼 3000명이 동원되었다. 큰 상여가 빈전을 떠나 동대문 근처 훈련원에 차려진 봉결식장에서 오늘날의 영결식과 같은 행사가 진행됐다. 봉결식 후 노제를 지내고 나서 오후 1시에 큰 상여가 출발하여 청량리를 거쳐 지금의 남양주 금곡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였다. 다음 날 하관을 거행하고 6월 12일 창덕궁에 우주(虞主)를 봉안하는 것으로 순종의 모든 국장은 마무리됐다.
순종의 국상과 독립운동
비록 망국의 황제였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각계각층에서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다. 특히 융희 황제의 승화를 기회로 독립운동의 기운이 고조됐다.
독립운동가 송학선은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척살하기 위해 이른바 금호문 의거를 단행하였다. '식민 통치'의 상징이었던 조선 총독 사이토가 4월 28일 조문을 위해 궁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금호문에서 기다리다가 그를 척살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송학선이 척살한 인물은 경성부협의회 의원 사토 토라지로(佐藤虎次郞)였다. 송학선의 단독 의거에 전국이 술렁거렸으며, 조선총독부는 물론 일본 내에서도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이렇듯 독립운동계에서는 고종의 장례식을 기회로 3.1독립선언을 기획했던 것과 같이 순종의 국상일인 6월 10일 거족적 만세운동을 시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6.10만세운동은 제국주의 일본의 철저한 봉쇄와 탄압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융희 황제의 승하 소식은 망국인의 슬픔과 분노로 표출됐다. 융희 황제에게는 일본으로 주권을 넘긴 역사적 과오가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니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당시 조선인들은 그의 죽음을 인간적으로 진정 슬퍼했으며, 그의 장례식을 독립운동 전개로 승화시키고자 계획까지 세웠다.
그 계획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그 후에도 '민(民)'들은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중국 마지막 황제 푸이의 일생과 죽음
중국 절대왕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1906년 2월 7일 북경에서 출생했다. 그는 평생 동안 세 차례나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1908년 세 살의 나이에 청나라 황제인 선통제(宣統帝)가 되었는데, 그 3년 뒤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청의 마지막 황제였지만, 더 이상 절대권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북경에서 멸망한 왕조의 끝자락을 잡고 있었다. 다만 중화민국에서는 청 황실에 대한 예우 조건을 내걸며 그의 편의를 봐주었다.
푸이는 1917년 캉요웨이(康有爲) 등이 벌인 복벽운동으로 12일간 잠시 황제로 추대되기도 하였지만, 1924년 11월 5일 펑위샹(馮玉祥)에게 자금성으로부터 추방되었으며 황제 칭호도 박탈당했다.
그는 부인 완롱(婉容)과 함께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였고, 1925년 2월 23일 일본 공사관이 비호 아래 상인으로 변장하여 텐진으로 갔다. 그의 나이 20세의 일이다.
텐진에서는 일본 조계인 장원(張園)에서 잠시 지내다가 다시 정원(靜園)으로 주 거처를 옮겼다. 푸이는 7년간 텐진에서 황제 부럽지 않은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며 일본과의 친밀도를 상승시켰다.
1932년 3월 9일 섭정, 1934년 3월 1일 만주국 황제, 그리고 제국주의 일본의 패망을 겪은 푸이는 푸순전범관리소에서 오랜 기간 '중생(重生)'의 뼈저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1959년 12월 푸이는 푸순전범관리소에서 나와 베이징에 도착해 1960년 1월 6일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면담했고, 2월 정협문사전원에 임명됐으며, 1964년 정협위원에 당선됐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황제'가 '공민'이 되었음을 널리 선전하였다. 그것도 사상개조를 받은 중국공문의 상징적 존재가 된 것이다. 푸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전범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보여주는 인물로 각인됐다.
중국의 존엄한 황제에서 평범한 공민으로 살아가던 푸이는 1967년 10월 17일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당연히 그의 장례는 전통적인 황제의 장례가 아니었다. '문화혁명기'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그의 유해는 화장한 후 국립묘지인 빠바오산(八寶山) 묘지에 안장됐다. 1995년 푸이는 선대가 묻혀있던 청의 서릉(西陵)으로 이장됐다. 살아서는 청의 선통제였지만, 죽어서는 능호를 받지 못했다.
민주공화정에서 황제를 생각하다
중국 난징에는 신해혁명의 주역 쑨원(孫文)의 묘가 있다. 그런데 그 묘의 이름은 중산릉(中山陵)이다.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신해혁명을 주도했으며, 그로 인해 태어난 중화민국의 대총통이었던 쑨원이 죽어서는, 그의 묘가 절대왕정의 황제와 같은 '능(陵)'으로 불리게 되었으니 아이러니하지 않겠는가?
물론 쑨원이 자신의 묘를 능으로 명명하라고 유언장에 명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대사에서도 그 국가의 최고지도자를 영생불멸의 존재로 신격화하기도 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실이고 현실이다.
민주공화정은 오랜 시간 피의 대가를 지불하고 인류가 쟁취한 고귀한 정치체제이다. 최고지도자는 그 권한을 국민에게서 위임받은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황족이었던 구 시대의 지도자가 아니다. 그래서 더욱 애민(愛民), 양민(養民), 안민(安民)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더욱 더 높이는 존재로 빛나야 하지 않을까.
한 왕조 마지막 황제가 '최고 존엄'에서 평민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그 비참한 운명을 안타까워할 일이 아니다. 그들로 인해 더욱 고통받고 비참했던 것은 민들의 생활이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역사적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