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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의 한국과 동북아는 독립운동가를 기념할 수 있나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중국 광저우 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독립운동가, 김근제와 안태
중국 국민당 육군군관학교(일명 황포군관학교)
코로나 팬데믹의 맹위도 어느 정도 잡힌 것 같다. 팬데믹으로 중국지역 한국독립운동 사적지 답사단의 활동이 중지된 지도 3년이 넘었다. 또한 동북아의 국제정세로 인해 한중관계 역시 코로나 팬데믹 이전 시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1992년 8월 한중수교 이후 한국과 중국은 경제적 파트너를 넘어 동북아 평화의 동반자임을 강조해 왔지만 최근에는 그러한 상황이 조금도 진전되고 있지 않은 분위기이다.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은 수천년간 좋든 싫든 이웃으로서 서로의 삶에 영향을 미친 존재였다.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에 가장 고초를 함께 겪었던 역사적 경험도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그 가운데 황포군관학교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아주 중요한 존재이기도 하다.
1924년 6월 6일 제1차 국공합작의 산물인 황포군관학교는 소련의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아 설립되었다. 정식 명칭은 중국 국민당 육군 군관학교이지만 주강(朱江)의 황포 장주도에 위치해서 일반적으로 황포군관학교로 불렸다.
장제스(蔣介石)가 황포군관학교에서 피압박 민족을 후원하여 한인 학생을 급비생으로 대우하자 입학 지망생이 증가했다. 한인들은 신식군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에서 중국의 새로운 정치와 군사를 배우고자 운집했다.
입학기는 8개월 주기였는데 학교 당국과 협의해서 한인에 한해서는 임시로 입오생(예비생) 입학을 허락했다. 그후 수용인원이 초과하자 별도로 학생군이라는 명칭으로 각지에 산재한 병영에 수용시켜 수비에 근무하고 동시에 군사정치를 교육했다.
제4기에는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 간부들이 대거 입학하였다. 황포군관학교 학생명단에서 확인된 한인 인원만 73명이었다. 우한(武漢) 분교를 비롯한 여러 분교에 재학 중인 한인 청년들까지 합하면 200명이 넘는 숫자이다.
이들은 황포군관학교 졸업 후 조선혁명군사 정치 간부학교를 통한 군사간부 양성에 힘썼으며,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하고 조선의용대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적 기초를 닦으며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나아가 황포군관학교 졸업생들은 1940년 한국광복군 설립에 필요한 인적 자원의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