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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국가 폭력, 일본인도 피해자였다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동북아에서 잊혀진 존재, 중국 잔류 일본인
중일전쟁과 '개척민' 그리고 만몽개척단(滿蒙開拓團)
1937년 7월 7일 북경 근교에 자리 잡은 루거우치아오(蘆溝橋)를 습격하면서 촉발된 중일전쟁은 만주국의 몰락, 나아가 일본제국의 몰락을 야기하는 원인이 됐다. 일제는 전선의 확장과 더불어 한반도에서 대규모 한인들을 집단적으로 만주지역에 이주했다. 강제이주가 광범위하게 진행된 것이다.
만주국의 북변진흥 정책 일환으로 더욱 강도 높게 추진된 집단부락 설치는 교통이 발달한 지역을 우선으로 진행됐다. 1936년까지 만주지역 특히 간도지역 집단부락의 추진 주체는 조선총독부였으며, 1937년 이후에는 만선척식주식회사의 주도로 진행됐다.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동아권업공사가 합동으로 사업을 전개한 반면, 1937년 만척이 본격적으로 사업에 참여하면서, 그 범위도 간도지역을 벗어나 전 만주로 확대됐다.
따라서 조선총독부가 집단부락을 설치할 때는 주로 간도지역이 그 대상이었지만, 만척의 경우 전 만주이고 또 그 강제성의 강도도 훨씬 더 심했다. 밀산 화평집단부락의 경우가 후자에 해당된다.
밀산지역은 러시아와 접경지역으로 1910년 전후 일찍이 독립군이 농장을 운영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목단강을 경유해서 목릉의 팔면통을 거쳐 점차적으로 집단부락이 설치됐던 곳이다. 그 대상은 경상도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내몽골의 한인 이주는 동북지역 보다 늦게 진행됐다. 1920년 포두 지역을 중심으로 건설된 한인촌은 자발적인 이주의 결과물이었다. 1937년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내몽골지역으로의 한인의 강제 이주는 '개척단'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됐다.
중일전쟁이 가속화 되면서 일제는 북만주와 내몽골 개척에 전력했으며, 만선척식회사는 이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현재 내몽골 흥안맹 선광촌의 경우 500여 호가 1945년 초 개척단으로 정착하게 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이들은 당시 만선척식회사가 설립한 농장에 강제 수용되어 생활했으며, 이곳은 기 정착민인 한족들의 거주지였으나 일제가 강제로 경작지를 몰수하여 분배했다. 따라서 내몽골에서 한인 이주와 정착은 또 다른 갈등의 소지가 있었다.
일제로서는 한인을 갈등의 전면에 내세우는 한편 개척의 선봉이라는 측면 역시 강조했다. 내몽골지역에서 한인의 강제이주가 개척단과 만몽청년의용군(滿蒙靑年義勇軍)으로 대별되듯이, 약탈과 수탈의 첨병으로 인식된 또 다른 한인의 모습이 역사의 잔상으로 남아 있다. 현재 내몽골 자라특기 선광촌 800여 명의 인구 가운데 약 80%가 '조선족'일 정도로 집단부락의 현재성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집단부락'의 창설을 문화창달의 선전의 장으로 활용했던 만주국은 구성원의 희생을 바탕으로 전시체제 만주국의 농업을 이끌어 갔다. 특히 만주국은 이주 한인들을 "만주에서의 자원 및 산업 개발의 선구"라고 한껏 추켜올렸지만 정작 그 주체인 한인들에게는 왕도낙토가 아닌 강제성이 담보된 또 다른 낮선 고향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