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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는 폭력적? '치하포 사건의 불편한 진실'이 불편한 이유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동북아 공생과 평화를 꿈꾼 백범 김구 이야기
제국주의 시대를 겪다
올해는 대한민국의 과거, 현재, 미래를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 해이다. 러시아는 이미 대선을 치뤘으며, 미국의 대선은 11월에 진행될 예정이다. 지도자의 위상과 역할이 아주 중요시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도자들의 편협한 자국사 중심의 역사관 등이 작동되어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오늘날 백범 김구의 헌신적인 독립운동은 지도자의 덕목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중국 포털사이트 가운데 하나인 바이두(baidu)에는 백범 김구가 남긴 <백범일지>가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한국인들에게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백범의 인생이 담겨있는데, 그가 리더로서 피눈물을 흘리면서 추진했던 것은 임시정부의 정상화였다. 그 작업 가운데 하나가 한인애국단의 조직이었다. 이를 통해 독립운동의 새롭고 강력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의열투쟁은 김구의 손에서 탄생됐다.
백범 김구는 1876년에 태어났다. 이 시기 전 세계는 서구자본주의가 제국주의 기치 하에 식민지 확장에 탐욕을 보였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서 일본 역시 류큐(琉球)를 복속하고 조선을 개항시켰으며, 1894년 청일전쟁의 승전물로 타이완을 차지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국주의 일본이 벌인 제노사이드의 실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 공동체의 문제였다. 동학농민혁명, 의병, 3.1운동, 경신제노사이드, 관동대학살 등 그 규모와 살육방법은 달랐지만 모두 제노사이드 범주에 속한다.
동북아시아 대부분 국가의 구성원들은 제국주의에 침략을 받았으며, 대한제국 역시 1910년 제국주의 일본에 강제 병합됐다. 김구의 나이 34살 때의 일이다. 그는 자신이 겪은 일을 후대, 특히 아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백범일지>를 남겼다.
필자는 2004년 12월 타이페이 한 호텔에서 학술회의를 마치고 주최 측의 만찬에 참가했다. 같은 테이블에 있던 노년의 신사는 필자에게 혹시 '김신'을 아냐고 물었다. 안다고 이야기 하자, 그 노신사는 김신이 내 친구라고 하면서 한참 동안 김신에 대해 이야기 했다. '김신', 바로 백범 김구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1962년 9월에 대만대사로 부임하면서 아버지가 강조한 아름다운 문화의 나라 대한민국을 알리고자 했던 것 같다. 당시 신해혁명의 주역이자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중국인들의 후예들을 주 대만 한국대사관에 초청하여 고마움을 표시하고 기념사진까지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