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 2018년 4월 대한민국과 북한의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났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판문점에서 만난 두 정상에 대해 국제사회에 관심은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전 세계 수많은 학자들은 저마다의 高見을 TV나 신문
등 언론매체를 통해 연신 토해내기도 했다. 분단의 연원이 제국주의시대에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반도 분단의 시계는 벌써 70년을 훌쩍 지났다. 냉전과 탈냉전을 거치면서 세계 곳곳에 있었던 이념의 분단과
장벽들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하지만 한반도의 분단체제는 견고했고 남과 북은 서로의 존재에 대해 알면서도 모르고, 모르면서 잘 아는 과정을 반복했다.
1945년 8월 일제의 패전과 우리의 해방은 중국 동북지역 한인들에게도 새로운 삶에 대한 갈림길에서 결정을 해야만 하는 사건이었다. 해방 전 중국 동북지역에 거주했던 한인 가운데 약 100만명이 한반도로 귀환하였으며, 나머지는 그대로 정주하면서 1952년 중국 공민(조선족)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조선족’들은 한국의 각 산업현장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약칭 연변)의 조선족들이 한국사회에 자리 잡은 지도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그들의 문화는 한국과 중국의 차이를 좁히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 동북지역은 역사적으로 中心과 邊沿을 반복했던 공간이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왕조와 근대국가의 생성과 소멸 속에서 한국사에는 ‘'고구려의 기상’이 서린 곳으로 강조되었으며, 일본인들에게는 한번쯤
‘제국의 꿈’을 실현했던 공간이었다. 중국사에서는 소수민족이 흥기한 곳이자 가깝게는 청나라의 발상지로 인식되고 강조되었던 지역이었다. 오늘날에는 중국이 ‘동북진흥전략’을 야심차게 계획하고 추진하고 있는
지역이다.
경술국치 이후 한국의 애국지사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전 세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들의 활동 무대 가운데 가장 치열하게 일제와 싸웠던 곳이 바로 중국 동북지역 이른바 만주지역이다. 한국
독립운동의 시간과 공간의 역사를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중국 동북지역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한국인들에게는 중요한 지역으로 각인되어 있다.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주의에 주권을 넘겼던 ‘경술국치’는 융희황제가 일본 명치에게 주권을 넘긴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융희황제가 주권을 넘긴 그 시간에도 새로운 주권국가를 만들기
위해 싸웠다. 중국 대륙에서, 미주에서, 유럽에서 전 세계에서 주권을 되찾기 위해 싸웠으며, 마침내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그해 4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대한민국이 3.1절을 기념하는 것은 바로 3.1독립선언의 적장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12월에 3.1절(독립선언일)을 제정하였으며, 오늘날에도 국가가 기념하고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들 누구나 3월 1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인들, 그 가운데 젊은이들에게 ‘대한민국 국치일’은 언제인가라고 질문하면 대부분 답을 주저하거나 포기하고 만다. 이웃나라 중국에 가서 중국인들에게 ‘중국의 국치일’이 언제인가라고 물으면 학생들까지도 ‘월 18일’이라고 빠르게 대답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은 1931년 9월 18일 이른바 ‘만주사변’이 일어난 날을 국치일로 기억하고 기념하기 때문이다. ‘만주사변’의 원인을 제공했던 ‘柳條湖’철로 옆에 ‘.18역사박물관’을 세워 1931년 9월 18일을 해마다 소환해서 기념하고 있다. 그것도 국가의 주도로 말이다. 한국은 1910년 8월 29일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대한제국의 주권이 완전히 넘어간 날임에도 불구하고 그날을 기억하고 기념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이 날이 국치일임을 잘 알지 못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이 책은 그 동안 중국 동북지방(만주)를 답사하면서 공간을 확인하고 기록의 역사를 뒤지면서 쓴 결과물이다. 시간의 흔적이 담긴 공간을 확인하는 작업은 가장 소중한 경험이자 자산이었다. 중국 동북지방은 역
사적으로 공간의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뀐 곳이다. 한국인들은 조선 후기부터 이주해서 일제강점기에는 약 200만명이 정책했던 곳이 바로 만주이다. 오늘날에는 중국 공민으로 살아가는 ‘조선족’의 집거구이기도하
다. 여전히 만주는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먼저 제1부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한인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북간도지역의 학생운동과 청년운동을 규명하였다. 이주한인들은 정착지에서 가장 먼저 학교를 세운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그만큼 교육을 통하여 인재를 발굴하고 그 인재들이 독립을 쟁취할 동량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북간도는 1860년대부터 이주한인들이 정착한 곳이다. 서전서숙, 명동학교 등 수많은 민족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그곳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3.13독립운동 때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때를 계기로 무장투쟁까지 전개하기에 이른다. 1920년대는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여 더욱 조직적인 학생운동과 청년운동을 펼친다. 특히 대중운동과 접목하여 이주한인사회의 동력을 추동하게 된다. 이러한 힘은 1930년대에도 이어진다. 학생과 청년들의 존재가 해방될 때까지 일제와 맞서는 중요한 자산이었다.
둘째는 독립군들의 존재의 원천인 인재양성과 무장투쟁 및 군자금 모금 실태를 정리하였다. 2011년 8월 신흥무관학교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독립기념관에서 진행하고 있는 국외사적지 실태조사를 ‘신흥무관학교 특집’으로 실시하였다. 이 때 지역으로는 유하현과 통화현 두 곳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였다. 통화현 합니하를 조사하면서 느낀 것은 기존의 연구에서 비정한 신흥무관학교의 위치가 정확한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신흥무관학교가 있던 공간을 고려관자라고 불리는 곳이라 하여 해자가 빙둘러 처진 비탈진 언덕배기라는 것이다. 마치 일본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천연적인 요새라는 주장이다. 이곳을 답사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 견해에 동의하는 것 같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합니하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공간적 설명을 제대로 하고 있는 사료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이처럼 신흥무관학교는 만주지역 대표적인 독립운동 인재배양의 요람이었지만, 정작 가장 활발하게 운영되었던 ‘합니하 시기’학교의 위치조차 정확하게 비정하지 못한 상태이다. 물론 신흥무관학교의 사진이 거의 발굴되지 않은 것 또한 신기할 따름이다. 이처럼 신흥무관학교는 서간도뿐만 아니라 만주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인재배양의 요람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명성에 비해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형편이다.
일반인에게 독립군이란 ‘고난과 열정의 화신’으로 인식되어 왔다. 독립운동은 조국을 위해 나를 버리는 길이다. 그만큼 독립군에게는 고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독립군은 중단 없이 맥을 이었고, 그 전통은 해방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런데 정규군이 아닌 독립군은 자신들을 어떻게 무장하고 어떠한 활동을 했을까. 그들이 활동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과 비용이다. 자금과 인적자원, 바로 독립군 조직을 지탱하는 두 축이자 키워드이다.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가 운동의 추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적자원을 확보하고 이와 병행해서 군자금을 모집해야 했다. 만주지역 독립군 단체는 냉정히 말하면 비정규군이다. 비정규군의 인적자원은 정규군에 비해 열악할 수밖에 없다. 인력수급도 부정기적이기 때문에 항상 대안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또한 용이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대 무장독립투쟁의 현장을 누볐던 인재들을 1910년대 착실하게 키워냈던 군관학교의 역할을 가장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제3부는 1930년대 만주지역 한인들의 강제이주와 안전농촌에 대해 살펴보았다. 만주국 건국 전 한인의 만주 이주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초기 이주는 조선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따른 생활의 곤궁에서 탈출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하나는 1910년 전후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식민지 경제재편을 통한 박탈감과 착취에서 벗어나려는 데 그 원인이 있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처럼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은 만주로의 한인이주를 가속화 시켰다. 안전농촌의 이주한인은 일제가 주장하듯 ‘안전’하지 않았다. 약자의 지위에서 처절한 생존문제에 직면한 경우가 허다했다.
제4부는 만주지역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을 정리하였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활동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네 명의 삶을 새롭게 드러내고자 하였다. 물론 홍범도처럼 이미 많이 알려진 인물
도 포함되어 있지만 신팔균, 이장녕, 황병길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신팔균과 이장녕은 모두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 출신이다. 신팔균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무신집안 출신으로 조부는 강화도
조약의 전권대사였던 신헌이었다. 그가 자신의 종택을 팔아서라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열정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했다. 이장녕은 신흥무관학교 교관과 교장을 거쳐 청산리 전투에 직접 참가한 지장이자 명장이었
다. 그의 가문은 1907년 12월 신민회의 결정에 따라 만주로 이주하였다. 우당 이회영 가문이나 석주 이상룡 가문의 이주보다 3년 이상 빠르다. 밝혀지지 않은 이들의 행정을 미력하게나마 복원하였다. 황병길은 훈춘의 호랑이라고 불릴 만큼 중국과 러시아 접경지역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안중근 의사와의 인연도 깊다. 역사의 작은 귀퉁이를 채우기 위해서라도 이들을 기억하고 소환해야 한다. 지역공동체의 소중한 구현을 위
한 작은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중국 동북지역 조사시 고생했던 고통의 기억들은 더 귀하고 갚진 인생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앞으로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러시아 연해주 및 몽골을 아우르는 한인이주사의 첫발
을 내딛는 심정으로 연구에 정진하겠다. 이 책에서 다루지는 못했지만 한인들의 정착지와 독립운동과의 연동성뿐만 아니라 미래에 갈등과 분열보다는 융합과 평화가 월등하게 우위에 있음을 알리는 데도 연구의
역량을 집중하겠다.
2018년 4월 대한민국과 북한의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났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판문점에서 만난 두 정상에 대해 국제사회에 관심은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전 세계 수많은 학자들은 저마다의 高見을 TV나 신문
등 언론매체를 통해 연신 토해내기도 했다. 분단의 연원이 제국주의시대에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반도 분단의 시계는 벌써 70년을 훌쩍 지났다. 냉전과 탈냉전을 거치면서 세계 곳곳에 있었던 이념의 분단과
장벽들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하지만 한반도의 분단체제는 견고했고 남과 북은 서로의 존재에 대해 알면서도 모르고, 모르면서 잘 아는 과정을 반복했다.
1945년 8월 일제의 패전과 우리의 해방은 중국 동북지역 한인들에게도 새로운 삶에 대한 갈림길에서 결정을 해야만 하는 사건이었다. 해방 전 중국 동북지역에 거주했던 한인 가운데 약 100만명이 한반도로 귀환하였으며, 나머지는 그대로 정주하면서 1952년 중국 공민(조선족)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조선족’들은 한국의 각 산업현장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약칭 연변)의 조선족들이 한국사회에 자리 잡은 지도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그들의 문화는 한국과 중국의 차이를 좁히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 동북지역은 역사적으로 中心과 邊沿을 반복했던 공간이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왕조와 근대국가의 생성과 소멸 속에서 한국사에는 ‘'고구려의 기상’이 서린 곳으로 강조되었으며, 일본인들에게는 한번쯤
‘제국의 꿈’을 실현했던 공간이었다. 중국사에서는 소수민족이 흥기한 곳이자 가깝게는 청나라의 발상지로 인식되고 강조되었던 지역이었다. 오늘날에는 중국이 ‘동북진흥전략’을 야심차게 계획하고 추진하고 있는
지역이다.
경술국치 이후 한국의 애국지사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전 세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들의 활동 무대 가운데 가장 치열하게 일제와 싸웠던 곳이 바로 중국 동북지역 이른바 만주지역이다. 한국
독립운동의 시간과 공간의 역사를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중국 동북지역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한국인들에게는 중요한 지역으로 각인되어 있다.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주의에 주권을 넘겼던 ‘경술국치’는 융희황제가 일본 명치에게 주권을 넘긴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융희황제가 주권을 넘긴 그 시간에도 새로운 주권국가를 만들기
위해 싸웠다. 중국 대륙에서, 미주에서, 유럽에서 전 세계에서 주권을 되찾기 위해 싸웠으며, 마침내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그해 4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대한민국이 3.1절을 기념하는 것은 바로 3.1독립선언의 적장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12월에 3.1절(독립선언일)을 제정하였으며, 오늘날에도 국가가 기념하고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들 누구나 3월 1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인들, 그 가운데 젊은이들에게 ‘대한민국 국치일’은 언제인가라고 질문하면 대부분 답을 주저하거나 포기하고 만다. 이웃나라 중국에 가서 중국인들에게 ‘중국의 국치일’이 언제인가라고 물으면 학생들까지도 ‘월 18일’이라고 빠르게 대답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은 1931년 9월 18일 이른바 ‘만주사변’이 일어난 날을 국치일로 기억하고 기념하기 때문이다. ‘만주사변’의 원인을 제공했던 ‘柳條湖’철로 옆에 ‘.18역사박물관’을 세워 1931년 9월 18일을 해마다 소환해서 기념하고 있다. 그것도 국가의 주도로 말이다. 한국은 1910년 8월 29일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대한제국의 주권이 완전히 넘어간 날임에도 불구하고 그날을 기억하고 기념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이 날이 국치일임을 잘 알지 못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이 책은 그 동안 중국 동북지방(만주)를 답사하면서 공간을 확인하고 기록의 역사를 뒤지면서 쓴 결과물이다. 시간의 흔적이 담긴 공간을 확인하는 작업은 가장 소중한 경험이자 자산이었다. 중국 동북지방은 역
사적으로 공간의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뀐 곳이다. 한국인들은 조선 후기부터 이주해서 일제강점기에는 약 200만명이 정책했던 곳이 바로 만주이다. 오늘날에는 중국 공민으로 살아가는 ‘조선족’의 집거구이기도하
다. 여전히 만주는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먼저 제1부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한인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북간도지역의 학생운동과 청년운동을 규명하였다. 이주한인들은 정착지에서 가장 먼저 학교를 세운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그만큼 교육을 통하여 인재를 발굴하고 그 인재들이 독립을 쟁취할 동량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북간도는 1860년대부터 이주한인들이 정착한 곳이다. 서전서숙, 명동학교 등 수많은 민족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그곳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3.13독립운동 때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때를 계기로 무장투쟁까지 전개하기에 이른다. 1920년대는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여 더욱 조직적인 학생운동과 청년운동을 펼친다. 특히 대중운동과 접목하여 이주한인사회의 동력을 추동하게 된다. 이러한 힘은 1930년대에도 이어진다. 학생과 청년들의 존재가 해방될 때까지 일제와 맞서는 중요한 자산이었다.
둘째는 독립군들의 존재의 원천인 인재양성과 무장투쟁 및 군자금 모금 실태를 정리하였다. 2011년 8월 신흥무관학교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독립기념관에서 진행하고 있는 국외사적지 실태조사를 ‘신흥무관학교 특집’으로 실시하였다. 이 때 지역으로는 유하현과 통화현 두 곳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였다. 통화현 합니하를 조사하면서 느낀 것은 기존의 연구에서 비정한 신흥무관학교의 위치가 정확한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신흥무관학교가 있던 공간을 고려관자라고 불리는 곳이라 하여 해자가 빙둘러 처진 비탈진 언덕배기라는 것이다. 마치 일본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천연적인 요새라는 주장이다. 이곳을 답사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 견해에 동의하는 것 같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합니하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공간적 설명을 제대로 하고 있는 사료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이처럼 신흥무관학교는 만주지역 대표적인 독립운동 인재배양의 요람이었지만, 정작 가장 활발하게 운영되었던 ‘합니하 시기’학교의 위치조차 정확하게 비정하지 못한 상태이다. 물론 신흥무관학교의 사진이 거의 발굴되지 않은 것 또한 신기할 따름이다. 이처럼 신흥무관학교는 서간도뿐만 아니라 만주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인재배양의 요람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명성에 비해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형편이다.
일반인에게 독립군이란 ‘고난과 열정의 화신’으로 인식되어 왔다. 독립운동은 조국을 위해 나를 버리는 길이다. 그만큼 독립군에게는 고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독립군은 중단 없이 맥을 이었고, 그 전통은 해방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런데 정규군이 아닌 독립군은 자신들을 어떻게 무장하고 어떠한 활동을 했을까. 그들이 활동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과 비용이다. 자금과 인적자원, 바로 독립군 조직을 지탱하는 두 축이자 키워드이다.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가 운동의 추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적자원을 확보하고 이와 병행해서 군자금을 모집해야 했다. 만주지역 독립군 단체는 냉정히 말하면 비정규군이다. 비정규군의 인적자원은 정규군에 비해 열악할 수밖에 없다. 인력수급도 부정기적이기 때문에 항상 대안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또한 용이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대 무장독립투쟁의 현장을 누볐던 인재들을 1910년대 착실하게 키워냈던 군관학교의 역할을 가장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제3부는 1930년대 만주지역 한인들의 강제이주와 안전농촌에 대해 살펴보았다. 만주국 건국 전 한인의 만주 이주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초기 이주는 조선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따른 생활의 곤궁에서 탈출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하나는 1910년 전후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식민지 경제재편을 통한 박탈감과 착취에서 벗어나려는 데 그 원인이 있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처럼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은 만주로의 한인이주를 가속화 시켰다. 안전농촌의 이주한인은 일제가 주장하듯 ‘안전’하지 않았다. 약자의 지위에서 처절한 생존문제에 직면한 경우가 허다했다.
제4부는 만주지역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을 정리하였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활동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네 명의 삶을 새롭게 드러내고자 하였다. 물론 홍범도처럼 이미 많이 알려진 인물
도 포함되어 있지만 신팔균, 이장녕, 황병길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신팔균과 이장녕은 모두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 출신이다. 신팔균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무신집안 출신으로 조부는 강화도
조약의 전권대사였던 신헌이었다. 그가 자신의 종택을 팔아서라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열정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했다. 이장녕은 신흥무관학교 교관과 교장을 거쳐 청산리 전투에 직접 참가한 지장이자 명장이었
다. 그의 가문은 1907년 12월 신민회의 결정에 따라 만주로 이주하였다. 우당 이회영 가문이나 석주 이상룡 가문의 이주보다 3년 이상 빠르다. 밝혀지지 않은 이들의 행정을 미력하게나마 복원하였다. 황병길은 훈춘의 호랑이라고 불릴 만큼 중국과 러시아 접경지역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안중근 의사와의 인연도 깊다. 역사의 작은 귀퉁이를 채우기 위해서라도 이들을 기억하고 소환해야 한다. 지역공동체의 소중한 구현을 위
한 작은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중국 동북지역 조사시 고생했던 고통의 기억들은 더 귀하고 갚진 인생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앞으로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러시아 연해주 및 몽골을 아우르는 한인이주사의 첫발
을 내딛는 심정으로 연구에 정진하겠다. 이 책에서 다루지는 못했지만 한인들의 정착지와 독립운동과의 연동성뿐만 아니라 미래에 갈등과 분열보다는 융합과 평화가 월등하게 우위에 있음을 알리는 데도 연구의
역량을 집중하겠다.
- 목차
- 머리말
제1부 부문별 항일운동
제1장 1910년대 북간도비밀결사운동
1. 머리말
2. 성립 배경
3. 동제회의 성립과 활동
4. 황병길과 비밀결사
5. 3・13 전후 비밀결사의 조직과 활동
6. 맺음말
제2장 1920년대 전반기 북간도지역 학생운동의 양상
1. 머리말
2. 3・13독립운동과 학생참여
3. 사회주의사상의 유입과 운동의 조직화
4. 동만청년총연맹의 조직과 활동
5. 맺음말
제3장 1930년대 만주지역 한인청년운동
1. 머리말
2. 東滿特委의 성립-다선에서 단선으로
3. 청년운동의 고조와 경계
4. 청년운동의 성격
5. 맺음말
제2부 군자금과 무장투쟁
제1장 1920년대 보합단과 대한의군부의 군자금 모금활동
1. 머리말
2. 독립운동단체의 재정확보와 군자금
3. 보합단의 성립과 군자금 모금
4. 대한의군부의 성립과 활동
5. 군자금 모금의 성격
6. 맺음말
제2장 1920년대 독립군의 인적기반과 재정
1. 머리말
2. 인적기반
3. 재정 모금과 유형
4. 맺음말
제3장